
[당선 소감]
글을 쓴다는 것은 익숙한 풍광을 낯선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상에서 작은 의문을 발견하고, 그 의문의 실마리를 따라가며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여정입니다.
이번에 은상을 받은 ‘깊이와 넓이’ 역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밥 한번 먹자”라는 인사말에서 출발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에 깊숙이 자리한 ‘정’이라는 ‘문화적 코드가 어떻게 사람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지, 그리고 그 관계의 깊이가 때로는 타인을 향한 문턱이 될 수도 있다’라는 역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글을 통해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익숙한 생각에 작은 균열을 내고 싶었습니다. 그 틈새로 새로운 시선이 스며들며, 서로 다른 가치들이 공존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이 마련되기를 기원합니다.
부족한 글을 귀하게 읽어주신 심사 위원 여러분과 코스미안 관계자 여러분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삶의 깊이를 잃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향한 시선의 넓이를 키워가는 것. 앞으로도 제가 글을 쓰는 이유이자 지향점으로 삼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칼럼] 깊이와 넓이
“밥 한번 먹자!”
우리는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메일로 보내세요”보다는 “밥 한번 먹자”가 먼저 나온다. 우리에게 밥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간극을 걷어내는 전가의 보도다. 문서도 노트북도 잠시 밀어놓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함께 밥을 먹는 이벤트는 서로의 거리를 좁히는 리추얼인 것이다.
한국인을 가장 잘 표현하는 영어 단어 하나를 고르라고 나에게 요청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Immediate’를 선택할 것이다. 흔히 한국인의 가장 두드러진 속성으로 ‘빨리빨리’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국인이 빠른 것은, 어쩌면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Immediate는 본질적으로 ‘매개체(media)가 존재하지 않은’, ‘사이에 아무것도 두지 않은’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을 견디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만나야 한다. 전화보다는 얼굴을 보며 이야기해야 하고, 가까워지려면 밥을 먹어야만 한다. 헤어질 때조차 “언제 밥 한번 먹자”라고 인사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한 밥상에 앉은 사람은 마침내 식구가 된다. 이러한 식구는 단순히 같은 조직에 속했다는 것보다는 함께 먹음으로써 관계가 쌓였다는 감각이 강하다. 말하자면 식구는 매개체가 존재하지 않은 공동체의 표상이라 할 것이다. 계약서가 우리를 묶기 전에 밥상이 우리를 묶는다.
그렇게 부대끼며 생겨나는 감정이 정이다. 이러한 정은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하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친함의 농도를 인정하는 관계적 코드다. 함께한 시간과 경험에 따라 관계의 농도가 달라지고 그 농도에 걸맞게 서로 다르게 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끼리니까”, “너니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정이 깊어질수록 너와 나 사이의 간극은 사라지고 마침내 ‘우리끼리’가 돼버린다.
그런데 관계가 깊어질수록 역설적으로 그 관계의 외연은 좁아진다. 식구가 생기면 식구 아닌 사람이 생기고, 우리가 만들어지는 순간 남도 만들어진다. 우리끼리의 정이 사적인 영역을 넘어 공적인 영역까지 넘어오면, 의리는 연고가 되고 배려는 특혜가 될 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서 공정이 등장한다. 정이 ‘우리끼리’의 문법이라면, 공정은 ‘동일하게’의 문법이다. 정이 친함의 농도를 긍정하는 관계적 코드라면, 공정은 그 농도를 희석하는 사회적 코드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미디어가 들어온다. 미디어는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벽이 아니다. 오히려 친함의 농도를 중화시킴으로써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끼리도 같은 사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마중물이다.
정은 깊이를 만들고, 공정은 넓이를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직접적인 관계에 집착할까? 그 뿌리에는 오랜 세월 전승되어 온 샤머니즘적 밈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역사에서 왕조가 바뀌면 지배적 사상과 종교가 교체됐다. 불교가 들어왔고, 성리학이 국시가 되었으며, 이후 기독교가 전파됐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가 유입될 때마다 이전의 심성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오래된 샤머니즘 지층 위에 불교가 쌓이고, 유교와 기독교가 차곡차곡 쌓였다. 표피의 종교는 바뀌었지만, 아래의 지층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국적 샤머니즘에서는 초월적 세계가 저 멀리 떨어져 있기보다는 굿이라는 현장으로 호출되고 있다. 신과 사람 사이의 경계가 일시적으로 좁아지고, 초월적인 존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작동한다. 역설적으로 무당이라는 미디어가 존재하지만, 그 미디어의 역할은 초월자를 먼 곳에 두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로 불러오는 것이다. 한국인의 뇌리에는 초월마저도 ‘지금 여기’로 불러들이는 현세적 감각이 존재한다.
이러한 문화적 밈이 종교의 영역을 넘어 인간관계에서도 반복적으로 작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신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좁히며, 함께 먹고 부대끼면서 서로를 ‘우리’로 만든다. 그리고 일과 결과 사이의 거리마저도 줄이고 싶어 한다. 그 끝에서 비로소 ‘빨리빨리’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빨라서 Immediate한 게 아니다. Immediate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빨라진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네이티브의 등장과 함께 이 오래된 문화적 문법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밀레니엄 세대에게 미디어는 반드시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다. 메시지와 플랫폼, 규칙과 경계는 타인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연결될 수 있게 한다.
기성세대의 문법이 “가까워져야 친해진다.”라면, 신세대의 문법은 “거리를 유지해야 오래 가까울 수 있다.”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세대 갈등은 ‘정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단순하게 환원할 수 없다. ‘사람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서로 다른 문화적 코드의 충돌일 수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사이를 지우면서 관계의 깊이를 얻었다. 지금은 이 관계의 깊이를 포기해야만 하는 시점일까? 오히려 낯선 사람과의 사이를 인정하고, 그 사이에 적절한 미디어를 놓음으로써 관계의 외연을 넓혀가야 하지 않을까?
정은 깊이의 기술이었다. 공정은 넓이의 기술이다. 우리에게 지금 진정으로 필요한 일은 깊이 대신 넓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잃지 않으면서도 넓어지는 방법을 체득하는 것이다.


